생각과 글/[추억]나와 사람들

작은 부조리

goodcomic 2022. 5. 23. 16:40

00. 작은 부조리

1990년
세계는 독일이 통일되고 공산주의 소련과 한국이 수교하는등 격변의 시기가 진행되고 
있었고 한국내부에서는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6월항쟁이후 시대의 재야단체들이
속속 조직되는등 사회 변화에 몸부림치는 시기였다. 

고등학교 공립 인문계 학교의 교실또한 격변의 시기인것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전교조에 가입한 선생님과 그렇지 않은 선생님이 공존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이 데모하는것을 극렬히 성토하는 나이지긋하신 선생님과
말로는 표현못하나 전교조를 지지하는 젊은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묘한 부조화를 느낀다.
정체성이 확립되기전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의 반복된 이야기는 세뇌되는것과 깨우치는것의 
중간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중요한것은 학력고사가 수학능력시험으로 교체되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12년을 대학입시에 매달려온 수험생에게 입시제도가 바뀐다는것보다 두려운게 무엇이랴.
학생들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위에서 혼돈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생님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다 세계가 변화하는 한 가운데 있었다.

다행히 수능을 치지 않으면 기존의 학력고사 시험체제에 따른 공부를 하면 되겠으나
1년에 한번있는 시험을 망쳐 재수를 해야할경우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게된다.
그러한우려는 연쇄적으로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하향지원이라는 모습으로 표출되었고
베이비붐 세대의 학력고사 끄트머리 시대는 그것자체로도 학생들에겐 재앙과 같은 시기였다.

그날은 여러모로 정신사나운 날이었다.
도심에서는 최루탄이 상시터지고 있었고, 머리벗겨지신 지긋한 나이의 수학선생님은
연신 정부에 저항하며 시위하는 학생들에대한 성토를 쏟아 내고 있었다.

저녁 자습시간
양복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교실에 들어왔다. 
그는 교실밖에서 머리가 벗겨진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자신이 이 고등학교를 몇년전 졸업했으며, 오랜만에 선생님들과 후배들을 보니 기분좋다며
이런저런 과거 학교이야기를 하며 주목을 끌었다.

하필이면 내 옆자리에서 떠드는것이 신경에 거슬렸으나, 보기힘든 광경이라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최근 국어 맞춤법 표기가 바뀐것 알고 있냐는 말을 하더니 책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변경사항을 요약한 얇은 책자였다.
그러더니 이어령전집을 사면은 이 책자를 끼워준다는 것이었다.

국어를 좋아하던 나는 맞춤법이 변경된것이 신경쓰이는 것도 있었지만 책장수라는것에
살짝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구매신청서를 반에 돌리기 시작했다. 할부였다.
그리고는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더니 이름을 적으라고 하는것이었다.

반의 아이들 모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갑자기 나의 구매신청서의 이름적는칸을 손으로 치면서 이름을 적으라고하였고
얼덜결에 나는 이름을 적고말았다.
그러자 그는 잽싸게 신청서를 나꿔채더니 가지고 가는것이 아닌가.

눈만 멀뚱멀뚱뜨고 있던나는 뭔가 잘못된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50명중에 4~5명이 낚여버렸다.

몇일후 교실로 책이 배달되었고 낑낑거리며 책을 들고왔다.

이후 지로고지서가 계속 날라왔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으나 전집이었으니 

꽤 가격이 나갔을 것이다. 

없는살림에 부모님한테 혼이났을것인데 뒤에전화걸어보니 반품은 안된다고 하고, 

아들 공부한다고 샀다니 어쩔수 없이 넘어간것 같다.

지금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나의 어리숙함을 탓해야하는 것인지,

책장사의 얄팍함을 탓해야하는 것인지.

책장사를 들여보낸 선생을 탓해야하는것인지는 모르겠다.

대학에 합격한후 영어책을 판다며 선배랍시고 전화오는 사람이 있었다.

거기에도 한번오라길래 어리숙하게 가보긴 했으나, 사지는 않았다.

과거의 경험탓일까?

각자의 상황에서 한번더 생각해보면 그시절의 경직된분위기와
각박함이 서로를 힘들게 한것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나이 한두살 차이나는 선배가 뭐라고 그렇게 무서웠을까.

학부형이되고 반백살 되어가는 지금생각해보면 참 순진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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