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작품/[만평]한칸만화

해방이후 한국사

goodcomic 2007. 1. 13. 14:23

 

역사는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고,역사를 사람이 만들어 나가기 때
문에 사람들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몸부림 치며 영욕의 세월을 겪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를 중학교때 부터 시험의 과목중하나로서 체계
적으로 배워왔을 뿐이며 입시에서, 공무원 시험의 필수과목으로 선택되어 선
사시대에서부터 주르륵 기계처럼 외어왔습니다.
어떤왕이 어떤 일을 했고 어느 년도에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저같은 경우는
고교시절 국사교과서를 페이지는 물론 주석 하나까지 외우도록 강요 받았으
니까요.) 하지만 이런 교육방법은 기계를 만드는 거지 성숙된 시민을 만드는
방법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현실을 떠난 암기과목의 역할뿐이었지
만 진정한 목적은 현실을 알고 미래를 예측할수 있는 기능입니다.
현실을 떠난 암기가 재미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어느 학교에서나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 혹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해온 해방
이후의 현대사를 다루면서 될수있으면 대학과정에서 교양과목이나 제가 접
한 책에서 나온 될수있으면 저의 주관을 배제한 내용을 담으려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도 이 만화를 보시는 분들이 현대사를 좀더 쉽
게 접근할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문헌> 1.한국사학회 편 - 한국사의 제문제 - 을서문화사
2.송건호 - 한국 현대사
3.한구사 연구협회 - 한국 현대사의 전개 - 탐구당
4.스칼라 피노,이정식 공저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 돌베개
5.박현채 외 - 해방전후사의 인식 - 한길사
6.하영선 편 - 한국전쟁의 새로운 접근 - 나남
7.한국정치 연구회 정치사 분과 - 한국 전쟁의 이해 - 역사 비평사
8.김철범 편 -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북한의 인식 - 을유문화사
9.한국역사 연구회 - 한국역사 - 역사 비평사
10.조정래 - 태백산맥 -해냄

 

 

 


 

 

45년 일본의 마지막 보루이던 100만의 관동군이 만주에서 패배를 한다. 표면상으로는 소련의 참 전이 원인이지만 만주지역 조선과 중국민중의 저항으로 소련군은 거의 수고없이 점령할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일본에 원폭이 있고 45년 8월 15일 드디어 우리는 역사적인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우리들 의 손에 의한 독립은 아니었기에 식민상황이상의 시련을 가져다 줄 것을 예고한다

 

 


 

독립의 염원이 강했던 만큼 20일이란 기간만에 자치기구인 '조선 인민 공화국'이 45년 9월 6일 국내에서 선포된다. 이 조직은 중경의 임시정부와 같이 한국인의 기대를 모았던 국내의 저항조직이 던 건국동맹에서 여운형등을 주축으로 중도우파와 온건좌파들이 모아 만들어 진 것으로 10월 16 일에나 귀국한 이승만을 주석으로 끌어들여 좌파가 많은 약점을 보완하며 치안대를 운영하는등 전국적으로 원활한 통치를 하는 기구로 인정되었으나 미군정은 한반도 남쪽의 점령을 선포하여 일장기대신 성조기를 올려 모든 독자적인 통치기구를 부정한다. (북쪽의 경우 소련은 자치기구를 인정하고 뒤에서 배후를 조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 참고: '조선인민공화국'은 북한의 대외명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과는 다르다. 전자는 좌우합작의 민족주의 사상과 좌파의 사상이 합작의 형식으로 뭉친 광복후 민족최초 정부성격의 집단이고, 후자는 북쪽의 공산당에서 만들어 진것이다.

 

 

 

우리를 분할 점령한 두나라는 각기 자신의 체제를 이식한다. 북에선 소련파의 김일성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민족적 문제를 청산하고 토지개혁(무상몰수 무상 분배)등을 실시하여 국가조직을 체계적으로 잡아간다. 문제는 남쪽에 있었다. 통치의 편의를 위해 청산되어야할 민족적문제를 뒤로하고 그대로 친일조 직의 행정력을 그대로 껴안게 된다. 다분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그들이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 지는 농민층 보다는 더욱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당시 농민중 소작인이 70%였음에도 토지개 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형식을 빌어 지주층의 이익을 표면화하여 농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 했다. 이상과같은 환경에서 국내의 정치조직간의 대립과 반목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친일 지주층을 대변하는 한민당의 이승만,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김구, 중도좌파세력인 여운 형, 사회주의 세력인 박헌영등은 미,소의 신탁통치문제에서 표면적으로 분단을 드러내기 시작한 다. 국민 대다수가 찬탁(신탁통치의 찬성)을 식민시대의 연장으로 생각하던 상태에서 국민들은 분노 했다. 사회주의자 김일성은 찬탁을 선택했고, 민족주의자 김구는 우리민족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며 끝까지 반탁을 주도했으며,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여론을 의식하여 초기엔 반탁을 주장하 다 찬탁으로 돌아섰으며 여운형등의 좌우합작을 이끈 중도세력은 찬탁을주장 했다. 이들을 서로 를 비방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분단의 기미는 표출되기 시작한다.

 

 

 

김일성은 평양을 해방구로 정해놓은 상태에서 북쪽지역만의 정부수립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이승 만은 폭압적인 반공공세로 정적을 제거해 나갔고 46년 6월 남한지역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정읍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통일을 위해 애쓰던 다른 정적들이 제거되고 남북 한은 김일성과 이승만의 이분체제로 나뉜다. 반공공세로 각지역의 사회주의운동,농민봉기,미군에 대한 저항을 모조리 쓸어나가는등 이승만의 세력이 확고해지면서 친일파의 문제는 흐지부지 해진다. 민족적 염원에 의해 어렵게 만들어진 '반 민족특별위원회'마저 이승만은 해산을 시킨다(표면상으로는 경찰청장이 지시한 것으로 나옴). 이러한 반공공세등의 당시의 복잡하고 암울한 상황을 잘 말해주는게 제주의 4.3항쟁인데 섬지방 이라 본토의 행정력이 잘 미치지 않던 제주는 '조선인민공화국'이 스스로 치안은 물론 토지개혁 , 세금의 징수까지 할정도로 잘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군정이 이를 전면부정하자 그곳의 사회주 의 세력이 저항하게되고 이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제주도 인구의 1/3이란 엄청난 숫자가 죽게된 다. 이승만은 이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을 다 죽이더라도 빨갱이를 뿌리뽑아라!"

 

 

 

이러한 비극이 이어지며 결국 민족사 최대의 비극이 터졌다.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한 김 일성이 제 3세계에서 흔히있는 권력장악처럼 해방전쟁이란 이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서울을 점 령함으로써 6.25는 시작이 된다.!"

 

 

 

하지만 삽시간에 미군의 개입으로 세계전으로 돌변하게 되고 . 이승만은 국군의 통수권을 미국에 이양함으로써 군대없는 대통령이 되었다. (얼마전 평시의 작전 권은 돌려받았으나 전시의 작전권은 아직 미국에 있다. 그러니까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현재 클린턴이 되는건가...) 우리나라의 전쟁을 하는데 국군에 UN군이 합류되는게 아니라 UN군속에 국군이 포함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된다.

 

 

 

53.7.27휴전이 되었고 최강대국 미국은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것도 북한과 중국이라는 제 3세계국가에게.. 미국은 북한에게 2차대전 당시 썼던 모든 폭탄의 1.8배를 쏟아부 었고 북한은 잿더미밖에 남지 않게된다. 이러한 대치상황에서 북한은 미국과 한국이라는 적을 상 대하기위해 얼마 되지도 않는 생산력의 대부분을 계속 군사비에 투자하게되고 한국도 같은 상황 에 처하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한건 군수물자보급으로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뿐이었다. 남한에선 이승만이 드디어 권력을 쥐게되고 농지개혁등의 실정과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과 부패 가 끊이지 않는다.

 

 

 

 

 

시민들은 60년 3월 5일 4대 정,부통령선출의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대구,부산,서울 마산등지에서 대거 시위가 일어났다. 그런데 마산에서 시위중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군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자 일제시대 친 일경찰의 연장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있던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하게 된다. 4.18일 고대시위를 필두로 4.19일 서울주요대학에서 고교생과 시민이 시위를 벌이고 일부는 대통 령관저로 진격하다 경찰의 총격으로 100여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4.25일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는 서울 시내 대학교수단의 시위와 미국측의 퇴진권유에 4.26일 이승만은 항복을 선언한다. 이를 "4.19"라고 한다. 이로서 자유로운 분위기가 고조되고 각층의 누 적된 욕구가 분출되어 이때부터 학생운동은 사회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 세력이 아닌 학생들에 의한 혁명인지라 학생들이 가지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직적 인 항휴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야당인 민주당이 정치를 위임받는 형식이 되어 미완의 혁명 이란 평가를 받는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제3세계의 정보가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자 통일논의에 대한 진보적인 정치 활동이 재개되었고 민통련(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어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 "한국문제는 한 국인의 손으로" " 소련에 속지말고 미국에 속지말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통일운동이 활성화 되었 다. 민주당 정부는 통일운동을 위험시 하면서도 통제능력이 없었고 민주당에서 구파가 떨어져 나와 신민당을 결성하는등의 정치적 파국만을 보여준다. 61년 5월 학생들의 남북회담이 확정되고 북한 의 지지등이 있달아 발생해 시위가 자주 발생했다. 또한 경제제일을 표방하여 감군을 하여 군부 의 불만을 사게 되고 결국 육사출신의 젊은 장교인 "박정희"란 사람이 나타난다. 61년 5월16일 새벽 육사 8기생 박정희는 3600명의 군대로 서울을 점령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쿠테타를 일으킨다.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조직으로 혁명공약을 내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부장 에 김종필을 앉힌다. 여러 가지 법 공포로 정치,사회,문화전반에 강권적인 조치를 진행한다.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용공분자를 색출한다며 진보정치단체, 노조,학생간부등 3,000여명을 검거 하여 혁명재판에 회부하고 4,000명의 폭력배를 검거한다.

 

 

 

 

민주공화당을 만든 박정희는 정치활동을 하고 63년 10월 새 헌법으로 대통령선거를 실시한다. 이 때 박정희 의장의 원대복귀와 후보출마간에 말이 많았으나 대통령에 나선다. 결국 15만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박정희는 당선을 하고 국회의원도 부정으로 공화당이 압승을 한다. 3공(1963년 12월 16일)이 들어선 것이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과의 국교수교와 불랙홀 같은 월남전에 한국전을 거친 한국의 우 수한 병력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박정희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박정희도 쿠테타 라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보장받기위해 위의 두가지를 적극적으로 행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새로운 정치이념으로써 민족주의적인 "새마을 운동","잘살아보세" 라는 경제제일 조국근대화의 기치아래 한일국교 정상화 베트남 파병 등으로 미,일에게서 경제원조와 정통성의 약점을 보완하 고 민주주의를 개발독재의 이념으로 압살하였지만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없던 상황에서 국민적 자각으로 민족성을 일깨운 것은 높게 평가 받는다.(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는 일본의 육사 출신이다.)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교섭이 이루어지고 일본으로 "독립축하금(?)"이라는 청구권자금을 소량 받아 굴욕적인 외교라는 여론으로 "6.3사건"이 일어난다.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협정을 계속했으며 월남전으로 파병을 하여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 여 기타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젊은이의 피를 파는 행위로 비난을 받기도 하며 실지로 아직 고엽제의 후휴증에서 신음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경제발전에는 박정희의 정책이아니라 당 시 세계적인 3저호황에 기인한다는 이론도 있다. 김대중과의 71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출신지 대구경북(TK)에의 특혜로 영호남의 양분현상을 드러 내게만든다. 71년 12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해 국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기본권을 제안한 다. 이때 중국의 UN가입과 닉슨의 중국방문,베트남의 공산화등 커다란 세계기류의 변화가 오고 이 위기이자 기회를 돌파하기 위해 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동시에 몰래 영구집권을 위 한 유신체제를 준비한다. 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과 국회해산으로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11월 국민투표로 확정되어 "통일 주체 국민회의"의 대의원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12.27일 8대 대통령에 취임해 무소불위의 권 력을 가지게 된다. 국민은 커다란 저항을 하고 김대중 구금, 장준하의 의문사, 투옥 해직. 북한과의 대화중단등이 이 루어 지고 베트남 공산화에 따른 학도 호국단과 민방위대 창설이 이어진다.

 

 

 

 

결국 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득표율이 앞서게 되고 국제사회의 인권탄압에 대 한 비난과 오일쇼크가 겹치게 되어 미국과 박정희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79년 5월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으로 인한 재명으로 부마사태가 일어나고 79년10월 26일 궁정동에 서 김재규에 의한 저격을고 박정희는 생을 마감하고 다시한번 피바람을 몰고온다. 그에 대한 평가는 진정한 카리스마가 없는 이시대에 찬양과 비난으로 양분되고 있다. 찬양쪽은 경제발전과 유일하게 부정축재를 하지않은 대통령이란 거다.(우스운 말이지만) 비난은 물론 독재와 민주주의 말살, 비정상적 경제성장 등의 폭압적 군사문화를 만든 것이다.

 

 

 

박정희가 죽자 군내에서 미군과 관계된 일을 해와 전부터 미군과의 관계가 있던 전두환은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고 쿠테타를 일으킨다. 6일만에 12.12일 정승화 총장을 납치하고 자신의 쿠테타를 합리화 시키려 한다. 하지만 민중의 저항을 두 려워한 그들은 안전을 위해 8개월의 준비기간을 둔다. 자신의 정권을 다져나가던 전두환의 음모가 드러나게 되고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5월 15일 10만여 명이 서울역 광장에서 연좌농성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군부에 의해 폭압을 당해와 두려움을 가진 시민 ,학생들은 군대의 진군에 맞서지 못하고 퇴각을 하게된다. 퇴각하는 적을 군부가 그냥둘리없다. 전두환은 계엄령과 재야인사의 구속, 언론통패합 삼청교육대,대학휴교령,국회의사당 봉쇄등으로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서울시민이 도망을간 것과달리 정면으로 저항한 곳이 있었다. 그곳이 광주... 5.18이다.

 

 

 

 

광주의 희생이 지금껏 왜곡되고 숨겨져 온것은 잘 알 것이다. 광주의 숭고한 희생은 역사에 본격적으로 독재타도에 민중이 주체로 등장하는 도화선이 된다. 하지만 민중의 지팡이보다는 권력의 시녀라고 일부에서(?)부르는 (내가 부르는 것은 아님) 경찰과 대다수 언론의 매도는 쿠테타세력의 권력을 더욱 확고화 시켜갔다.

 

 

 

 

그과정에서 노동악법과 집시법등이 만들어졌고, 고문과 대북한관계의 경색, 연기처럼 사라진 금강 산땜(당시 국민학교때 선생님에게 안맞으려고 당시 일주일 용돈이던 거금 500원을 냈음.)과 함께 권력형 암흑경제가 성장하게 된다. 전 정권때 세계는 3저(달러,금리,원유가의 하락)으로 호황에 접 어들어 물가는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당시의 3저현상기는 과도하게 오른 국제 원자제가의 거품을 제거하는 시기였으므로 오히려 물가의 하락을 가져와야 했으나 물가는 내려가지 않았다. 알다시피 우리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은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잔업에 철야근무에... 다시 말해 전에 비해 노동생산성은 엄청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이로인한 이윤은 재벌기업의 부동산투 기와 정치판의 상납으로 이어졌다. 이로인한 물가상승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언론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가상승을 임률상승으로 보고 있으나 노동생산성이 4배오른 상황에 임률이 2배오른다고 물가상승을 임률상승에만 떠넘기는 것은 아주 무책임한 생각이다. 우리나라 에서 주된 물가의 상승은 부동산가격에 있다. 부동산가격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전두환은 3S육성(Sports프로야구,Screen성인영화,Sex성문화 개방)등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노력했다. 전두환은 또한 학생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 유신시기에도 없던 학내에 경찰을 배치 하는등의 업적(?)을 쌓는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학생회는 활발한 활동을 하고 학우들의 신임도 얻게 된다.

 

 

 

 

85년 2월 12일 총선에서의 득표율에서 집권여당은 패배를 한다 이후 계속되는 민주화의 열기로 위원회에서 거수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닌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를 할 것을 국민들은 열망하게 된다. 이는 야당의 당략과도 맞아 직선제 개헌투쟁이 벌어지고 이로 수많은 시위가 생 긴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를 힘으로 파괴하고 계속적은 집권을 위해 직선제를 거절하는 4월13일 "호헌(헌법수호)조치"를 취한다.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결국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박종철은 시위의 수배자나 피의자가 아니라 단지 참고인일 뿐이었음) 과 6월9일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고 결국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6월 민중항쟁"이 시작된다. 정권의 제약에도 계속 시위가 터져 6월 18일 전국 16개 도시에 150만이 거리를 가득메웠다. 전두 환은 10만 경찰을 투입하려 했으나 오히려 경찰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군대를 투 입하려면 전군을 투입해야할 상황이었다.

 

 

 

 

결국 전두환은 항복하고 차기 주자인 노태우에게 6.29 선언(대통령직선제,구속자,김대중의 사면)을 하게 한다. 그것은 총칼의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마감 한 것에대한 벅찬 환희였다. 7.8.9월에는 노동자 대투쟁으로 정부와 언론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가 활성화 되어 노동자의 지위가 올라가고 80년 이후 처음으로 13%라는 두자리 실질 임 금인상률을 이끌어 낸다. 인구의 60%인 노동자가 가장 밑바탕에서 억압질서를 뒤흔들어놓으면서 끝내는 그것을 뒤엎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놓았다.

 

 

 

 

 

6월항쟁이 있은 5개월후 대통령 선거가 있던 12월 16일에 부정선거와 권력욕에의해 국민을 져버린 양김씨에 의해 노태우는 올림픽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잘 알다시피 거액의 비자금문제와 정치력의 문제로 물(水)태우,돈(?)태우등의 애칭을 갖게 된다. 죽쒀서 개준 두 김씨에 대한 항의로 정치불신감이 심화된다. 4개월 뒤 총선에서 처음으로 여소 야대의 국회를 국민들이 만들어 주어 광주항쟁과 5공비리심판등을 하는 성과를 벌였으나 5공핵심 정권이 5공청산의 과제를 맞는 아이러니가 생겨 오래가지 못했다.

 

 

 

또한 얼마지 않아 엄청난 일이 생긴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귀중한 투표권을 행사해 만들어낸 여소야대의 국회가 "노태우+김영삼 +김종필=민자당"이라는 공식에의해 거대여당이 탄생하는 것을 보게되고 국민들은 정치적 혐오감 을 극심하게 느끼게 된다.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이 취임을 하게 되고 문민정부를 표방한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이로서 3번째(박정희,노태우,김영삼)의 실패를 맛보고 정치를 물러난다는 선언을 한다. 이 선거에서 우리는 가슴아픈 분단을 하고 있으면서도 반동강난 조국의 하반부에서의 분단을 경험하게 된다. 정치는 민족의 화합에 우선하는 것인가? 또하나 집고 넘어갈 것은 돈의 위력이었다. 정주영 옹 의 능력... 돈의 위력에 우리

는 새삼스럽게 놀라게 되었다.

 

 

 

 

개혁을 내세우며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일부 5.6공인사의 사정을 단행하여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키고, 금융 실명제등의 개혁을 실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두 대통령은 1년도 안되어 석방이 거론되고 있으 며 금융실명제는 일부조항의 수정으로 무의미한 제도가 아닌가하는 말까지 듣고 있으며 국가경제 는 지금까지 쌓여오던 구조적 문제가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최악의 상태로 치닫게 되었고 비리가 곳곳에서 드러났고, 온국민이 "스피드"의 주인공이 된것처럼 부실공사로인한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기게되었고 노동법의 개악을 가져

오게되었다.

 

 

 

 

드디어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게 되었다.
결과는 수많은 도전끝에 김대중 선생이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누가 되느냐보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인들의 정략적 협력과 난국을 타개하는 대책보다는 헐뜯기 논쟁, 그리고 IMF사태의 책임 떠밀기전... 미디어들의 대통령만들기, 편파보도등 많은 문제점들만 노출시키고 있다.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만을 부추기는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역사는 계속됩니다.